top of page
검색
작성자 사진Admin

대한제국과 기독교 : 1897년~1910년 (2)

▣ "1900년 12월 1일" 친러파친미파를 제거할 목적으로 ‘기독교인 말살’을 계획했다.

대한제국 황실의 재정을 담당하던 이근택과 이용익, 여기에 당시 경찰청장 김영준 등이

고종 황제의 가짜 칙서를 만들어 지방 관청에 명을 내렸다. 내용은 ‘모든 기독교인과 선교사들을 음력 10월 10일(양력으로는 12월 1일)에 모두 죽이라!’는 것이었다. 황해도 지역 순회 전도를 갔던 언더우드 선교사는 ‘기독교인 살해 칙령’을 전해들은 후 에이비슨Oliver R. Avison(한국명: 어비신, 1860-1956년) 선교사에게 라틴어로 전보를 보내 최종적으로 알렌이 고종에게 음모를 보고했다. 에스더 9:26-32의 ‘부림’(제비 뽑기)에 빗대어 이 사건을 ‘한국의 부림절 사건’으로 부르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11월 한달간 미국교회는 한국과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한국명: 하리영, 1865-1949년) 캐나다 출신 의료선교사.

토론토 의대를 졸업한 후 YMCA의 파송을 받고 "1890년"에 조선에 입국했다. 19개월 동안 부산에서 세관 직원 전담 의사로 활동하다가 원산으로 갔고(1893년), 1898년에 미국

남감리회 선교부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03년"에 미국 남감리회 중국 여선교사였던

화이트, 원산의 여선교사 캐롤, 매컬리 등이 기도모임을 하다가 *사경회에 하디를 강사로

초청했다. 이 때 하디는 선교의 결과에 실망하고 있다가 누가복음 11:13 묵상을 통해 성령의 인도와 능력을 따르지 않았음을 깨닫고 자신이 먼저 회개했는데 이것이 ‘원산 부흥

운동’(1903-1906년)의 시작이다. 선교사의 공개적 회개는 교인들의 회개로 이어졌다.

"내가 죄인입니다."


▣ 사경회Bible Conference Movement 네비우스의 선교 정책의 기초는 ‘성경’이었고 선교사들은 성경을 가르칠 기회를 만들기 위해 애썼다. 한국의 겨울철에 교회들이 연합해서 성경을 읽고 배우는 사경회를 열었다. 사경회의 목적은 성경을 집중적으로 강의함으로써 신앙을 강화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 부흥회는 체험, 질병의 치유, 개인 구원에

대한 강조가 특징. 사경회는 이런 면들을 배제하고 전적으로 말씀을  중심으로 한

집회였다. "1909년" 기준, 장로교에는 800여 개의 성경 공부반이 있었다.


◈ "1904년" 일본과 러시아가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충돌했다. 러시아는 북위 39도선으로 한국을 나누어 통치하자고 주장했지만, 일본은 철도부설권을 얻어 한반도의 교통망을 장악했다. 결과는 일본이 승리했고 전쟁 비용을 댔던 로스차일드가문이 막대한 수익금을

챙겼다. 이 때 한국은 중립을 선포했으나 일본은 한성을 공격해서 강제로 「한일 의정서」를 체결, 한국에 일본 군대를 주둔시키고 고문을 두어 간접 통치를 실시했다. 러일 전쟁이 끝난 1905년에는 대한제국 친위대가 일본에 의해 해산되고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 통감(총독)에 이토 히로부미를 임명했다. 이토는 1909년에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에게 사살되었다.  


▣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 교회의 사경회 강사는 이길함 선교사와 길선주 영수(장로)였다. 14일 동안의 사경회는 오전 성경 강의와 토론, 정오 기도, 오후 전도, 저녁 집회로 이루어졌다. 길선주 장로는 선도(관성교: 관우를 숭배하는 종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인물로 새벽기도를 처음 시작했다. 다른 부흥 운동들처럼 죄의 자백과 회개가 부흥의 시작이었다. 말씀과 기도로 이루어진 부흥 운동의 결과, 교회는 일제 강점기 동안 핍박과 환난을 인내할 수 있는 영적인 힘과 거룩한 기억을 제공받았다. 신앙고백과 교리교육이 약화되었다는 부정적 평가 역시 존재한다.



조회수 1회댓글 0개

Kommentare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