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7년 9월 17일" 대한제국 첫 장로교회 목사 안수식이 장대현 교회 내 ‘남자석’에서
거행되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독노회>의 첫 노회장은 마포삼열 선교사였다. 노회는
이날 오후 목사고시를 실시해서 후보자들의 설교문과 강해를 검토했으며, 신학·교회 정치·
교회사·성경 입문 등을 문답으로 진행했다. 5년간 평양신학교에서 수업한 후보생들(한석진, 서경조, 양전백, 길선주, 방기창, 이기풍, 송인서)은 「장로회 표준문서」(헌법: 12신조,
소요리 문답, 정치, 예배 모범, 권징조례)의 준수를 선서한 후 안수를 받았고 연장자인
서경조 목사의 축도로 안수식을 마쳤다.
◈ 김점동Esther Kim Park(1877-1910년)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인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1858-1902년)의 소개로, 메리 스크랜턴이 세운 ‘이화 학당’에 네 번째 학생으로 입학했다(1887년). 감리교 선교사인 프랭클린 올링거에게 세례를 받았다(1891년). 자신을
통역으로 고용한 로제타 셔우드를 비롯한 여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볼티모어 여자 의과대학(현재 존스 홉킨스 의대)을 졸업했다. 윌리엄 제임스 홀(청일 전쟁 때 전염병으로 사망)의 조수로 일하던 남편 박유산은 김점동의 의과대학 졸업을 3주 앞두고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귀국 후에는 여성 전용병원인 「보구여관」과 평양의 「홀 기념병원」 등에서 환자들을 진료했다. 첫 10개월 동안 3,000명을 진료할 정도로 전력을 다하다가 "1910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윌리엄과 로제타의 장남인 셔우드 홀은(1893-1991년) 한국에
결핵협회를 설립하고 ‘Christmas Seal’을 발행했다(1932년).
▣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1856~1922년)이 설립한 상동감리교회의 담임 전덕기 목사와 교인들(이동녕, 박용만, 이승만, 이회영 등)은 교회가 운영하던‘공옥학교’(초등학교에 해당)에서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결성했다. 1905년 맺은 을사조약의 무효투쟁을 위해 김구, 이준 등이 신민회에 출입하고 있었으며,1907년에는 헤이그 특사를 계획했고, 중등학교에 해당하는 ‘상동청년학원’을 세워 교육을 통한 독립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 당시 스크랜턴은 친일파 해리스 감독과 충돌하고 성공회로 옮겨 간 후였다.
이시영, 이동휘, 안창호, 윤치호, 양기탁, 이경희, 최광옥, 김규식, 김구 등이 주축이 되어
<신민회>를 이끌었으며, 이후 일제 강점기에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고(1911년)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성했다(1919년). 1911년 일제에 의해 조작된 ‘105인
사건’(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주장)으로 신민회는 해체되었고
주요 인물 6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승만, 김규식 등은 각각 미국과 몽골로 망명했다.
마포삼열 선교사의 구명 활동으로 대부분이 풀려났다.
◈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본에 강제 병합되었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대한제국의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일본의 천황은 대한제국의 국호를 ‘조선’으로 돌려놓았다. 1905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의 권리들을 하나씩 빼앗았다. 대한제국의 친위대를 해산했으며(1905년), 화폐 정리 사업으로 조선의 상업자본을 몰락시켰고(1905-1909년), 외교권을 박탈했다(1905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으며(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했다(1907년). 사법권과 교도 행정권을 강제로 위탁받았고(1909년), 의병 소탕 작전을 벌여 항일 의병들은 만주로 이동해야 했다. 마지막 남은 경찰권마저 "1910년" 일본의 손에
넘어갔다.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마태복음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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